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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유럽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들다운 건조함의 색은 대개 잿빛을 띠고 있다. 코끝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겨울의 파리한 낯빛의 소년과 메마른 말을 건네는 아버지, 그리고 죽음.
동유럽의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관찰하는 듯한 시선.
이 영화를 본지가 꼭 2년 전의 10월 4일인데도 아직까지 제법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걸 보면 당시의 섬세했던 나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었나보다.
당시에 써두었던 유치해서 차마 이 곳에 쓰기조차 민망한 감상을 인용한다. 신학 수업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교수님이 원하는 주제로 통일하려 애를 썼다.
Oct, 4, 2005 作.
과연 과학적인 논리에 딱 들어맞는 것들은 전부 믿어도 괜찮을 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처음에 가졌던 의문이었다. 자신들이 가진 이성의 힘만을 맹신한 채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탑을 쌓아올렸던 바벨탑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신뢰할만한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영화에서 나오는 주요 인물은 파벨과 파벨의 아버지 그리고 파벨의 고모이다. 여기서 파벨의 아버지는 바벨탑의 이야기와 비교해본다면 하늘에 닿으려고 하는 ‘인간’ 에 해당한다. 파벨의 고모는 파벨의 아버지와는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이다. 수직선으로 비유했을 때, 파벨의 아버지가 왼쪽 끝이라면 파벨의 고모는 오른쪽 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파벨의 역할은 아버지와 고모 사이의 중간점에 해당한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아버지 쪽에 치우쳐있다가 후에 고모 쪽으로 이동한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파벨의 아버지는 이성과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이다. 그는 과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며 컴퓨터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파벨의 고모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며 과학을 맹신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 격인 파벨은 굉장히 똑똑한 소년으로 과학을 매우 신뢰했지만, 얼어죽은 개의 시체를 보고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고는 과학에 의문을 가진다.
처음에 과학은 매우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파벨이 개의 죽음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고모가 등장하고, 이야기는 조금씩 과학의 맹신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진다. 결국 컴퓨터가 얼음이 깨지지 않는 상태에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이 얼음이 깨져서 죽었을 때, 이 영화는 절정에 다다른다. 즉, 과학은 정확한 학문이긴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들어맞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과학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는 그런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1계명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에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비신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느님을 흠숭하라.’ 라는 것보다는 ‘과학을 너무 맹신하지 말라.’ 에 더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말 부분에서 파벨의 아버지가 종교를 찾는 것도 비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식이 죽은 것을 상심해서, 그 상처를 종교에 의지해서 잊으려고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일종의 종교에 대한 귀의라고나 할까. 다만 이 영화가 종교 영화를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면 주제는 역시 1계명과 같을 것이다. 발표했던 조에서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처음에 등장하는 그 관찰자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절대자, 즉 하나님이라고 암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여러 가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현재의 생활의 기반을 이루는 것인 만큼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종교나 신은 비과학적이라며 미신으로 취급하고, 과학의 효용성만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과연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완벽한 것일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과학의 힘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존재하고, 또한 과학의 힘으로도 완전히 막아낼 수 없는 자연 재해가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은 과학을 너무 맹신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와 같은 것이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은 절대자의 뜻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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