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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의 <하녀>가 개봉했던 시기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태어나기 한참 이전이다. 즉, 이 시기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밖에는 정보를 접할 수 없다. 영화 역시 연출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만큼, 영화가 개봉하고 있던 시기의 시대상에 대해 알아야하는 것은 어쩌면 필수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감상하는 자가 잘 알지 못하는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라면, 영화의 이해를 위해서라도 당시의 시대상과 연관시키는 작업은 필요하다.
1960년에 개봉한 김기영의 <하녀>는 실상 1960년대보다는 1950년대 중후반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1950년대 초반은 소위 6.25라 불리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있었던 때이고 1950년대 중반 이후는 전후 상황을 수습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미국, 일본을 비롯한 ‘우방’이라 불리던 나라들에 ‘의한’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서울에는 도시적 생활양식과 미국식 대중문화의 급속하게 유입되었다. 1950년대 시민사회 성장과 연관해 특히 주목할 것은 도시화, 공공 영역의 팽창, 반공이데올로기 강화다. 여기서 <하녀>와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부분은 도시화다. 도시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그만큼 현대 도시의 이중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향도이촌으로 인해 농촌은 텅텅 비고 도시와 공장에만 사람이 넘쳐나게 된 것이다. <하녀>의 시작이 방직공장이라는 사실은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서 기인한다. 50년대 중후반에는 무엇보다 중고등교육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50년대 중후반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에 성공하는 사람들이 늘자 입시 경쟁을 비롯하여 교육의 기회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졌고, 치맛바람이라 불린 사교육 열풍이 사회문제로 대두하게 된다. <하녀>에서 동식이 비록 방직공장이지만 ‘음악 선생님’이라는 점 또한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아진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1960년 김기영의 <하녀>는 인물이나 배경 등 영화의 일면에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1950년대 중후반 자화상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녀>는 환상적이다. 하지만 1960년 김기영의 <하녀>와 2010년 임상수의 <하녀>는 환상성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바흐친은 환상성을 이야기할 때 메니피아로 설명했다. 메니피아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건들의 평범한 전개, 언어적인 것을 포함하여 이미 형성된 행동 양식이나 예의 범절을 위반하는 것이 특징으로 갖고 있다. 인간적 사건들에서 이미 규정된 정상적인 과정을 파기하고, 전제된 규범이나 동기부여로부터 인간의 행위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즉, 메니피아는 결정적인 것이거나 미리 계산된 것이기를 거부한다.
메니피아적 관점에서 김기영의 <하녀>는 서사적 구조를 통해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하녀에서 만들어지는 환상성은 일종의 금기를 깬 불편함 같은 것이다. 김기영의 <하녀>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 자체는 특수하지 않다. 주된 배경인 집은 하녀를 쓴다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인 으리으리한 집이나 상류층의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하녀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정도로 지나치게 평범한 가정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도 잔인하거나 공포를 일으키는 장면이 없지만 영화 전반에는 괴기한 분위기가 흐른다. 김기영의 <하녀>가 메니피아적 인 이유는 ‘하녀’의 성격과, 하녀가 만들어내는 서사구조가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하녀를 맡은 이은심의 연기력만으로 논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영화의 괴기스러움은 보통 사람들이 하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 순종적이고 모든 것을 감내해야하는 인간상이 파괴되면서 형성된다.
반면 2010년 임상수의 <하녀>는 공간적 구조를 통해 메니피아를 표현한다. 임상수의 <하녀>에서 하녀를 쓰는 집은 현실과는 제법 이질적이다. 2010년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이 하녀가 일하는 집의 내부에는 수영장이 있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나선형의 계단이 있다. 재벌2세라도 되지 않는 한, 도심지에서는 보기 어려운 저택이다. 2010년 부의 상징은 저런 형태의 저택이 아니라 강남의 타워팰리스 같은 고층의 주상복합 건물임을 고려할 때 충분히 현실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다. 타워팰리스 이야기를 뺀다고 하더라도 고층아파트 천지인 2010년의 서울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평범한 일상을 임상수는 공간적 설정을 통해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녀가 일종의 집사역할을 하고 있는 조병식에 의해 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현실에서 환상의 공간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영화 <장화홍련>에서 수연(문근영 분)의 가족이 들어가게 되는 집 현실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계산되지 않은 환상의 공간인 것과 마찬가지다.
50년의 간극을 둔 두 <하녀>가 메니피아를 구현하는 방식은 카메라와 인물의 성격에 차이를 둠으로써 구체화된다. 김기영의 <하녀>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녀’를 제외하면 당시의 평범한 인간군상을 대표하고 있다. 방직공장의 음악부 선생이자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인 동식과 과로를 할 정도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하는 동식의 아내, 그리고 방직공장의 인물들은 1950년대 중후반의 산업화세대와 맞닿아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역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예는 있지만 부는 없는 직업이다. 게다가 학교 선생님도 아니고 방직공장의 음악부 선생인 동식이라면 더욱 부와는 거리가 멀다. 즉, 동식은 필연적으로 체면과 돈, 모두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동식의 아내 또한 순종과 희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어머니상인 전형적인 인물이다. 반면 하녀는 ‘파격적인’ 인물이다. 남자를 과감하게 유혹을 하고 그 남자를 소유하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동식에게 매달리기도 하고 협박을 하기도 하면서 당시의 전형적인 여성상에 해당하는 동식의 아내와 대비되는 캐릭터다. 스스로 요구하고 주도하는 여성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비정상적이고 광기있는 다소 ‘미친’ 여자로 그려진다. 기존의 여성상을 파괴한 하녀는 지극히도 메니피아적으로 이 영화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무렇지 않게 주인집 아들을 죽이고, 경찰에 갈 거라며 협박하는 모습은 분명 이전의 여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기에 파격적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촬영방식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몫 한다. 마지막에 동반자살을 시도한 동식이 아내를 찾아갈 때 김기영은 풀샷을 잡지 않고 남자의 발목에 매달려 끌려내려가는 하녀를 보여준다. 이는 결코 잔인하거나 공포스러운 장면이 아닌데도 오싹함을 자아낸다. 공간과 함께 담아내는 풀샷보다는 주로 신체의 일부분(얼굴이나 발걸음 등)을 주로 보여줌으로써 인물 자체의 특성을 부각시켜, 인물이 주는 오싹함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임상수의 <하녀>에 나오는 인물들은 전형적이지만 ‘특수한 환경’ 속에서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김기영의 <하녀>와는 차이를 보인다. 훈과 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점에 선 인물이다. 2000년대를 장식한 패러다임인 신자유주의는 자본이 가지는 힘에 무게를 실어왔고, 하녀는 그러한 자본의 정점에 선 인물들을 제시한다. 훈과 해라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이 소유한 자본으로 문제를 해결하려하고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다. 이들은 자본이 있음으로서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하고, 군림하려는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 현대 사회에서 자본은 일종의 권력이다. 권력없는 자본은 있지만 자본없는 권력은 없다. 인물 그 자체로 시대상과 욕망이라는 개인적 욕구를 보여준 김기영의 <하녀>와는 다르게 임상수의 <하녀>는 자본주의 사회를 상징하는 공간적 장치 속의 인간형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나선형 계단 위에서 하녀를 내려다보는 장면에서처럼 인물 개인 샷보다는 정수리 위에서 인물을 내려다보는 방식이나, 피아노를 치는 훈을 멀리서 풀샷으로 잡는 것과 같은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공간적인 배경이나 장치를 인물과 함께 담아내면서 공간이 가지는 상징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저택이라는 특수하지만 자본권력의 무게가 느껴지는 공간을 담아내기 위한 필수적인 촬영방식이었다. 고급문화처럼 자리잡은 와인을 소재로 쓴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김기영의 <하녀>와 임상수의 <하녀>는 50년의 시간적 차이만큼 1960년과 2010년의 사회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적극적인 1960년의 하녀는 같이 죽자면서 동반자살을 하는 것으로 본인의 의지를 관철시키지만, 2010년의 하녀는 동반자살은 커녕 혼자 죽어버린다. 물론 훈과 해라의 일상은 별다른 변화 없이 평소처럼 지속된다. 이는 그 시대에 비해서 현재 자본에 의해 형성된 계급적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다. 임상수의 <하녀>는 자본의 힘 아래에서는 무력한 2010년의 현실 그 자체다. 이 영화가 진정 의미하는 것은 자본의 영향력이 확대된 만큼, 가진 것이 몸뚱이 외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그 차이를 뛰어넘기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녀의 바람이 이루어진 김기영 <하녀>의 결말과 하녀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묘사된 임상수의 <하녀>의 결말은 이러한 시대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단지 개개인이 가진 가치관의 변화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사회 전체의 변화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능력있는 자(그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든, 본인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든)가 승리의 결과물을 독식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경제위기로 인해 실패로 드러난 지금,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복지적' 입장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원하는 이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씨앗은 밑바탕에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이들의 자유의지와 연대를 통한 행동에 의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이처럼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은 구성원의 자유 의지와 사회적 연대이다. 우리 사회가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변화하고자 하는 자유의지, 그리고 사회적 연대에 의거한 행동을 통해 한 단계 진보할 때, 1960년의 <하녀>와 2010년의 <하녀>가 가지는 차이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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