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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보고서/movie

독한 스릴러는 가라, 『골든 슬럼버』

by FC 2010.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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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감독 나카무라 요시히로 (2009 / 일본)
출연 사카이 마사토,타케우치 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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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다. '총리 암살범으로 간주되어 쫓기는 시민영웅'의 이야기라는 흥미로운 소개때문에 보게 되었는데, 사실 장르가 '스릴러'로 표기되어있어서 영화의 분위기를 무겁게 상상했던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스릴러는 점점 내용보다는 표현에 치중하고 있다. 누가 더 잔인하고 누가 더 극적인 캐릭터이며 누가 더 반사회적인지를 보여주려 경쟁하듯 생산해내는 한국 스릴러영화는 잔인함과 찝찜함을 빼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한국 스릴러는 일단 스릴러라는 장르 표기가 있다면 보지 않았다. 스릴러영화가 본디 그런 것인지는 깊게 알아보지 않아서 모른다. 하지만 누가 더 극단까지 치닫는지를 경쟁하는 한국 스릴러에 대한 내 선입견은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는 상태다.

일본 영화는 지루하지만 섬세하다. 일본 영화는 촌스럽고 화려하지 않지만 따뜻하고 '인간'에 집중한다. 내가 지루한 것을 싫어하는데도 일본 영화를 나쁘게 평하지 않는 이유다. 섬세한 감성은 다소 흐릿한 색감이나 느린 화면 전개, 롱테이크의 적절한 활용으로 표현되는데, 골든 슬럼버도 - 비록 스릴러라는 장르에 속해있지만 - 그러한 일본 영화의 공식같은 특성을 비교적 잘 따르고 있었다.

시민영웅이지만 택배기사인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 평범한 남자는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결코 슈퍼맨이 되지 않는다. 그는 본래 슈퍼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사회는 그에게 슈퍼맨이 될 것을 요구하지도, 거세게 반발하라고 몰아세우지도 않는다. 우연이 계속되는 것, 그를 믿는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반대로 이 영화의 따뜻한 감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느림의 미학은 주인공과 사람들의 유대 관계로서 살아숨쉰다.

가장 일본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은 - 어쩌면 사회적 풍토의 반영일지도 모르지만 - 회의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결말이었다. 기존에 수없이도 접했던 영화적 상상력이 바닥났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영화, 그리고 이 영화의 감수성을 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이 아니었나 싶다. 그만큼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도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본영화답다는 생각부터 가질 만큼.

스릴러지만 극단은 없다. 내용 자체의 쫓고 쫓기는 치밀함만 갖추고 있을 뿐, 한국 스릴러에서는 빠지면 섭할 잔인한 장면들도 없다. 플롯만으로 긴장을 유발하고 캐릭터의 따스함과 상황적 유머로 그 긴장을 해소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보고 나면 잔인한 영화를 보고 났을 때 그 특유의 질펀함이나 끈적함으로 찝찝하지 않다. 추격자가 한국식 스릴러의 포문을 연 것처럼 이 영화도 일본식 스릴러의 포문을 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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