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지는 사실 꽤 지났는데 이제야 감상을 적는다. 사회학의 개론적인 내용, 사회학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왜 사회학인가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학적인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배울 수 있었다. 결혼을 단지 사랑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일환으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평가하고 고민하는 시각이 아주 좋았다.
* 사회통제란 사회의 저항하는 성원들을 다시 협조하도록 하기 위해 사회가 사용하는 다양한 수단을 가리킨다. 가끔 만나는 소규모집단이라도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해체되지 않으려면 그들 나름의 통제메커니즘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광장공포증 : 강박신경증의 한 증상이다. 낯선 거리나 사람들이 밀집한 백화점이나 광장 또는 공공의 장소 등에 혼자서 나가게 되면 심한 공포감에 휩싸이며 어쩔 줄 모르게 된다.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고 현기증이 나며,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심장이 크게 뛰는 등의 급성불안발작, 즉 공황발작(恐慌發作)이 먼저 일어나고 이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광장(廣場)이란 그리스어 agora의 역어로서 장이 서는 공공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광장은 꼭 아주 넓은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터널 안이나 정류장 사이의 거리가 먼 노선을 운행하는 전차 속 등 좁고 폐쇄된 장소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런 폐쇄된 장소에 대한 공포증, 폐소공포증도 광장공포증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 상황정의 : 미국의 사회학자 토마스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사회적 상황이란 그 사회적 상황에 참여하는 자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즉, 현실은 정의하기 나름이라는 의미.
* 사회통제를 담당하는 공적인 기관들은 대부분 일반적으로 알려진 폭력수단의 사용가능성이 지니는 억제력에 의존하고 있다. 폭력을 항상 사용하는 것은 실행불가능하며 비효과적이기 때문이다.
* 어떤 사회이든 제기능을 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폭력이 경제적으로, 또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궁극적인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단순한 위협만으로도 매일매일 사회통제를 행하는 데 충분하다. (=폭력수단의 사용가능성이 지니는 억제력) 가장 중요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상황이란 다른 모든 강제수단이 실패할 때 폭력이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사용되는 그런 사회상황이라는 사실이다.
* 한결 덜 폭력적인 사회통제의 수단들은 커다란 다양성과 상상력까지 보여준다. 정치적 법적 통제의 다음으로 경제적 압력이 있다. 인간의 생계나 이익을 위협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통제방법은 별로 없다. (반대로 인간의 생계나 이익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민심획득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선심성 空약이 넘쳐나는 것일 게다.) 경영자나 노동자는 이러한 위협을 사회에서 하나의 통제수단으로서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제라는 수단은 경제라고 불리는 제도 밖에서도 똑같이 효과적이다. 이를 테면 목사가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를 유혹하는 것은 불법적인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목사의 직업수행을 영원히 못하게 하겠다는 위협은 감옥에 보내겠다는 위협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부여된다. 또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지탱되어야하며, 매우 꾸준하게 지탱되어야 한다. 사람 혼자서는 결코 어떤 특정한 정체성도 붙잡고 늘어질 수 없다. 장교가 지닌 장교로서의 자아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러한 정체성 속에서 인정하려고 하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유로운 시민에서 하룻밤 사이에 죄수가 된 사람은, 지난날의 정체성을 확인해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직접적인 환경(=감옥) 속에 없기 때문에 지난 날의 정체성을 그 자신의 의식속에서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놀랄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 자신이 죄수에게 기대되는 바대로 행동하게 된다.
* 결혼은 본능이 아니라 제도다. 제도의 명령은 다른 모든 선택 가능한 방법을 배제시키고 그의 사회가 그에게 미리 규정해놓은 방법(결혼)을 선택하도록 한다. 혼전임신을 했을 때의 선택지를 예로 들 수 있다. 제도 하에서는 결혼 or 낙태 or 미혼모밖에 선택지가 없지만, 제도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여자가 첫 아기를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자의 어머니쪽 삼촌에게 양육을 부탁할 수도 있다. --> 왜 제도하에서는 안되는가? 이것을 고민하려면, 혼전임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순결 등)을 바꾸어야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사실 죽는 것은 항상 하나의 개별적이며 고독한 개인이다. 그러나 사회는 각각의 죽음을 그것의 공포를 완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일반적인 범주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유족과 또 그 자신들도 죽을 운명인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를 테면, 누군가 죽으면 "뭐,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야 하니까." 하고 위로하는 식이다. 즉, 그것은 모두이면서 아무도 아니다. 우리 자신을 일반성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혼자서 고독하게 죽을 것이라는 필연적인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숨긴다. 사회는 자유로부터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