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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또 전염병이란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눈이 보이지 않아, 를 외치는 세상. 눈먼 자들의 도시다. 눈병이 전염병이라는 발상, 원인보다는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될 것인지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있을 법한 가상사회에 대한 단상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내가 본 꼭지는 사라마구가 택한 방식, 원초적 본능에 의존한 사회, 인간 근원의 이기심과 이타성, 폭력, 그리고 희망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인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대신 첫 번째로 눈이 먼 사람, 의사, 의사의 아내와 같은 식이다. 우리시대의 이름이란 자신을 가장 대표하는 어떠한 징표다. 우리는 이름을 통해 기억하고 이름을 통해 인지한다. 본래는 사람이 있기에 이름이 있는 것이지만 사실 이와 같은 본말전도는 인간이 '이름'을 붙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사라마구는 이름에 대한 이런 상식을 깨고 있다. 그는 이름 대신 그 사람 자체의 특성, 소설 내에서 가장 확실하게 그 사람을 나타낼 수 있는 특성을 이름 대신 부여한다. 안과의사, 의사의 아내, 처음으로 눈이 먼 사람. 얼마나 그 사람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이름인가? 우리는 굳이 조지, 제임스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도 그가 누군지 어떤 성격인지, 그리고 그의 이름이 그와 눈먼 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명확하게 상상할 수 있다.
눈먼 자들로만 가득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눈먼 자들의 사회에서 떠오른 것은 원시사회였다. 7seeds라는 만화가 있는데 이 만화의 '가을'팀에 해당하는 사회, 즉 어느 정도의 조직은 갖추고 있지만 그 조직 자체가 지독히도 원시적인 환경 때문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나 대화의 힘 같은 것은 전혀 통하지 않는 사회와 매우 유사하다. 조직의 우두머리 급의 사람과 원초적인 본능에 의존한 사회. 의사 아내와 의사는 여기서 우두머리 같은 존재다. 다만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의사와 의사 아내는 어떤 강압적인 힘도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레 우두머리처럼 되었다는 것. 아니 대표라고 해두는 것이 좀 더 적확한 표현일 것 같다.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사회를 원시사회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나만을 위하고, 본능에 충실한 원시적인 모습. 어쩌면 그는 그러한 개인들이 조직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공동체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비인도적이고 비합리적인 조직은 원시성으로 가득한 상황의 힘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해체된다는 것. 원시 조직사회에서나 나타날법한 무장 깡패들이 의사의 아내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혼자 눈이 보이는 이의 전지전능한 능력보다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의미한다. 내부로부터의 반발과 개혁은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민주화 운동이 그랬듯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눈먼 자들의 도시가 원시사회와 닮았다는 점은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근거다. 인간의 이성보다 이미 형성된 상하위 계급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헌신이 요구되는 사회는 하위계급이 상위계급에 굴종하지 않으면 폭력과 같은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하위계급을 제압한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폭력에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하게 되는 건, 무언가를 본다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가 남을 통해 전염된 질병에 의해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내 권리를 잃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가 '격리수용조치를 내린 정치인'과 '눈이 먼 이들에게 총을 쏴대는 군인들의 폭력'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사라마구의 이름과 조직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아닌 무언가가 있어요, 그게 우리예요.
조직이 있어야지, 인간의 몸 역시 조직된 체계야. 몸도 조직되어야 살 수 있지, 죽음이란 조직해체의 결과일 뿐이야.
다른 사람과 사는 게 어려운 게 아니야, 이해하는 게 어려운 거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함께 살아간다. 이 소설은 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명제와, 어떤 결속력을 가지고 조직을 만들고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회 구성의 중요성을 다소 극단적인 언어로 역설하고 있다. 잘 조직된 군사와 오합지졸의 차이는 그 조직력에 기인하지 않았던가, 스포츠 경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가 아니었던가. 군집이 조직이 되려면 타인을 이해하고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진리를 사라마구는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한 가지 또 눈길을 끄는 점은 인간에 대한 이타심과 이기심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타심과 이기심은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가치인데도 이 소설에서는 엄연히 양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사의 아내는 굉장히 이타적인 사람이지만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의사 남편과 눈먼 이들을 돌보는 이유에 인간 본연의 이타심과 혼자서만 볼 수 있다는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이기심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보지 못하는, 원초적인 욕망이 가득한 세상을 나 홀로 보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어쩌면 눈이 먼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에서 유일하게 격리된 존재, 한편으로는 신처럼 전지전능할 수 있는 존재가 의사의 아내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의사의 아내의 이기심은 이타심이라는 명목으로 - 물론 그녀의 본성적인 이타심은 분명히 존재했다. - 포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선입견을 깨는 설정은 '백색질병'에서도 드러난다. 보통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눈 앞이 까맣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소설 속의 전염병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난다. 보이지 않는데 하얗게 빛난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어둠인데 하얗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떤 희망고문일까. 다시 앞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암시였던 걸까? 아니면 새로이 정화된 관계, 눈이 보이지 않았던 원시사회로부터의 깨달음이 현재의 삶을,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데 변화를 준다는 징조였을까? 사실 노인과 검은 안대를 한 여자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눈이 멀지 않았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고, 그들 자신도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들 둘의 사랑(?)은 이루어졌다. 사라마구는 백색질병이라는 모순을 통해 그런 작은 변화를 암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들리지 않는 것,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감촉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파장이 크다. 후자의 3가지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뿐더러 그에 따른 불편함을 감수하면 된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직접적인 어려움이 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의 사회는 어떤 것일까.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가상의 사회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사실적인 묘사가 오히려 더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인간만큼 이성적이면서 비이성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인간의 이성은 당연한 것에 제약이 가해졌을 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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