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사회화 과정은 매우 느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성인이 되기까지의 시간동안 보고 듣고 몸으로 체득하면서 아기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사회화는 아기에 한정하여 진행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사람은 또다시 사회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만 아기의 사회화와 다른점은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성장하는 아기와는 달리, 성인 이후의 재사회화는 관습이나 기존의 습성, 가치관 등을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전승철. 단지 이름만으로 북한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 것은 북한 출신의 방송인 전철우씨가 떠오르는 탓이다. 누군가의 이름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규정짓게 하는 속성을 가진다. 김춘수는 꽃에서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나는 의미있는 누군가가 된다고 했다. 무산일기 속 전승철을 규정하는 것은 두 가지다. 전승철, 그리고 125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이 묵묵한 탈북자의 두 이름은 무산일기의 상영시간 내내 건조하게, 또는 가슴 저미게 다가온다.
철거촌 임대아파트의 낡은 화장실에서 피묻은 옷을 손세탁하는 장면, 침대에서 뒹구는 경철을 애써 외면하면서 빨래를 널러 가는 장면의 승철은 재사회화가 필요한 ‘사회적’ 아기다. 영화는 공산주의 환경에서 살아온 세월을 뒤로 하고 자본주의의 정글에 내던져진 승철의 일상을 비교적 건조하고 담담하게 묘사한다. 번지르르한 겉모습이 중요하고 나를 위해서 때로는 남을 눌러야하는 경쟁사회에서 소심한 북한청년 승철이 설 곳은 없다. 영화는 전단지 붙이기에서도 경쟁에 밀려 얻어터지는 장면, 남한의 생활에 비교적 능숙하게 적응한 경철이 승철을 무시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는 승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소심하게 교회 여성을 엿보며 뒤를 밟고 버려진 강아지(=이하 백구)에게 애정을 쏟는 것으로 묘사된다. 재사회화되기 전의 승철에게서 느껴지는 연민의 감정은 그의 고집이 그가 살아온 세월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
백구는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치이며 소외된 승철 자신을 상징한다. 숙영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좀처럼 위로 올라가기 어려운 서민층을 대변한다. 백구와 숙영의 교집합에는 승철이 있다.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에 적응하지 못해 소외된 승철,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에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한 채 성인 노래방을 운영하는 숙영. 승철이 백구와 숙영에게 애정을 쏟는 것은 어쩌면 ‘125’라는 이름이 규정한 본인의 한계에 대한 연민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르디외는 주관적인 일상생활상의 실천은 단지 제한적으로만 변화가능하며, 개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공간과 그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에 너무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말했다. 승철의 변화는 부르디외의 말처럼 그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인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계기는 중요하지 않다. 승철은 변해야만 했고 그렇게 변해가고 있을 뿐이다. 경철에게 친구 돈을 떼어먹지 말라고 화를 내던 승철은 점차 경철의 돈뭉치를 들고 말끔한 복장으로 교회에 가는 인물이 된다. 북한에서 건너온 북한 사람 전승철이 아니라 남한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승철로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남한사회에서 ‘아기’나 다를 바 없던 승철이 정을 쏟던 백구가 죽은 것을 외면하는 것으로 승철의 적응을 예고한다. 감독은 백구에 대한 승철의 외면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해야 최소한의 삶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공간에 대한 저항보다 순응과 포기를 선택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보다 살아지고 있는 우리네 사회를 연상시킨다. 승철의 변화가 먹먹하고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승자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은 탓이 아닐까. 영화 속 승철이 남한사회를 능숙하게 살아갈수록 익숙한 대사가 떠오를 것 같다.
‘까라면 까야지, 뭐 어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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