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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만들어내는데 비극적인 장면만큼 강력한 자극제는 없다. 비극적인 장면은 대개 행복한 순간이 길수록, 그리고 최고조의 행복일수록 그 깊이를 더한다. 윤제균감독의 해운대 역시 이러한 레퍼토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포근한 일상과 웃음에서 빚어지는 행복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 영화는 위기로 치닫고 몇몇의 죽음으로 눈물을 '만들어' 낸다. 대중의 눈물을 만들기에 가장 적합하고 손쉬운 방법이지만 이제는 제법 식상하다. 할리우드의 재난영화에서 의례적으로 사용해왔던 방식을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운대는 4가지 관계를 보여준다. 해체된 세 유형의 가족과 이제 막 시작할 연인을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보여준다. 설경구와 도망간 설경구의 부인과 아들, 하지원과 원양어선에서 죽은 하지원의 아버지는 둘 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가족의 해체를 나타낸다. 또한 이 해체된 가족은 설경구-하지원의 관계, 하지원-설경구의 어머니의 관계, 설경구-작은 아버지의 관계에 영향을 주면서 갈등의 구조를 형성한다. 반면 이민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민기는 하지원의 누나로 해체된 가족의 일원이지만, 가족의 해체가 그의 관계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이민기의 관계는 가족과는 별개의 '새로운' 인간관계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엄정화와 박중훈의 관계는 이민기의 관계와 설경구-하지원의 관계의 사이에 위치한다. 해체된 가족이 인간관계 형성에 장애가 되지도 않지만, 가족이라는 그 이름만으로 극적인 상황에서 '온전한 형태의 가족으로의' 결합을 이끌어내는 구조다.
이 구조는 극의 흐름에 있어서 눈물을 만들어내는 요소다. 해운대의 흐름은 할리우드의 재난영화 투머로우와 포세이돈을 합쳐놓은 것 같다. ' 재난 암시→평화롭고 소소한 일상(설경구가 아들의 이를 빼주는 장면이라던가) 속의 갈등양상 겉핥기(설경구 어머니와 하지원의 갈등, 설경구 내면의 갈등이나 죄책감 등)→행복의 절정(불꽃놀이를 볼 때의 행복감, 설경구의 고백)→재난→꼬여있던 관계의 회복'의 흐름을 취한다. 행복과 재난암시의 불안감을 대조하는 방식은 위기에 가까워질수록 횟수가 잦아진다. 행복이 절정에서 꺾이는 순간, 내리막길과 함께 '눈물 만들어내기'의 막이 오른다. 예상치 못한 상황의 돌발적 위협을 보여주기 위해 재난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다가 상황이 터지고 나서야 뒤늦게 수습하기 바쁜 장면은, 투머로우의 그것을 빼다 박았다. 그나마 해운대가 할리우드 영화보다 약간이나마 가질 수 있는 특징은 '하지원 아버지의 죽음'과 '구조대원 이민기의 죽음'이라는 설정 뿐이다. 죽음은 늘 극적인 장치이자 결합의 계기라는 사실을, 감독은 영리하게 이용한다. (사실 이민기 같은 경우, 할리우드 영화 '가디언'에서 그대로 따온듯.)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향기가 너무 짙게 배어있어서 짜깁기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건 감독의 영리함이 먹혀들어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해운대의 감동은 잘 짜여진 '만들어진 감동'이다. 한국사회가 민감하지만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애틋하기 그지 없는 '가족'과 관계로 맺어진 '희생'의 코드를 적절하게 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것은 그 두 가지 코드를 엮어내는 방식이 할리우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다. 한국형 재난영화, 천만 관객이 본 영화라는 거창한 수식어에 비해, 천편일률적인 할리우드의 상업성을 그대로 답습한 개성없는 플롯은 눈물이 나오려다가도 쏙 들어가버리게 만드는 눈물 억제제다.
덧. '사람 구하는 데 100만원 밖에 안줘?' 같은 소위 '현실 까기용' 대사들도 너무나 어설프고 직접적이라 거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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