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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보고서/books

이시다 이라 '아름다운 아이'

by FC 2009.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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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이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시다 이라 (작가정신,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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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 모를 검은 손이 뱃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한 여자아이의 목숨이 그렇게 무거운 것일 줄이야. 나는 그 사실을 수요일 아침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뉴타운은 털을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햇빛을 받아 달구어진 아스팔트가 물컹물컹하다. 그 위를 걷자니 프라이팬 속의 팝콘이 된 기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뉴타운은 경직되어갔고, 사람들이 쏟아내는 짜증스런 기운이 거리를 덮었다.

(카즈시는)가족에게서 몇십미터나 떨어진 듯, 갑자기 작아져버린 것 같았다. 동생은 의자에 앉은 채로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생명없는 13세의 마네킹 같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 그것은 얼굴 없는 사람이 누르는 벨소리다.

사람을 죽인 다음에도 살아야 하는 카즈시가 불쌍했다.

팟팟 터지는 플래시. 마치 빛의 채찍으로 집을 때리는 것 같다.

카즈시가 보호된 날부터 우리 가족을 덮친 폭풍은 그날 밤의 저기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셌다.

카즈시의 사건 이후로 나는 화내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진흙 덩이를 한 움큼씩 맞으며) 기계처럼 반복하는 건, 눈물이 나오지 않아 좋다.

상처 입은 정의. 야마자키는 그렇게 격렬하고 용서를 모르는 그 힘을 몰랐다.

찜찜한 뒷맛은 오래오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고독한 사람과 고독한 사람이 만나면, 일 더하기 일은, 그저 일일 뿐입니다.

너는 시대의 유행을 타지 않는 일을 택해서, 그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일본도 변하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시대에 들어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대부분의 가족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이, 서로의 가슴속을 그저 희미하게 추측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먹선으로 눈을 가리지 않은 사진도 얼마든지 돌아다닌다. 우리 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욕구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넌 그런 말을 아무 전주도 없이 막 하는구나."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한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변하지 않는 것과 계속되는 것. 학교란 그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죽은 이의 어머니에 대해)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마음이 다 닳아서 감정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면 오쿠노야마는 빛나는 거리의 중심에 움츠리고 있는 검은 짐승 같았다.

그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삼 분 정도 걸어서 거리감을 거의 잃어버릴 때쯤에, 솟구치는 녹색 구름 같은 거대한 나무가 서 있는 공터에 이르렀다.

올바른 기준은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 주위 어른들의 저열한 행동이 소년들의 성장을 촉진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전국 어디를 가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른 사람과 똑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의 압력에 찌부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구입 기념으로 다시 읽은 이시다 이라아름다운 아이는 긴장감에 곁든 사회적인 메시지 외에도 훌륭한 문장들이 많았다. 나는 새삼 배울 것이 생긴 것에 고마워했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가 만들어낸 괴물 '밤의 왕자.' 그는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으며 스스로의 인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일본 못지 않게 과열된 교육열기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아이같은 카즈시와 어른스러운 미키오, 거칠 것 없는 언어로 자유를 갈망하는 하루키, 여장을 하는 소년 나가사와, 그리고 밤의 왕자로 소멸한 마츠우라까지. 사춘기의 열망은 어느 곳으로든 뻗어있지만 그 열망은 학교와 입시성적의 벽에 막혀버려 비뚤어진 욕망이 된다. 뒤틀린 욕구가 빚어낸 참극. 아이들의 문제가 비단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어른의 문제는 비단 어른들만의 문제일까? 너도 나도 남인 시대에 상처받은 정의는 모두를 관찰자로 만든다. 그리고 문제를 타자화하고 소외시켜 버린다. 소년의 호기심이나 적극성이 없었다면, 유메미산의 자살 사건처럼 그대로 묻혀졌겠지.

과열된 교육열기, 타자화, 가십거리를 위해 제멋대로 보도하는 황색 저널리즘. 세상의 추악한 단면을 중학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날카롭게 풍자한 이시다 이라의 글은 정녕 아름다운 아이만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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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에 쓴 포스트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소설인 아름다운 아이. 하지만 드라마 같은 전개나 쉽게 읽혀지는 문체가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기노사키에서’ 를 읽을 때도, ‘아름다운 아이’ 를 읽고 난 지금도 나에게 떠오른 것은 ‘살아있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살아있는 것은 말 그대로 ‘살아만 있는 것’이다. 다소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달리 표현하면 우리말로는 어법에 어긋나지만 ‘살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것은 나의 의지로 사는 것으로, 능동적이고 한편으로는 적극적이기도 한 삶의 양태이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은 ‘소년’ 들이다. 그것도 치열하게 성적만을 바라보고,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명문 중학교에 다니는 소년들. 아니 일본에서 초등학교 입학 나이는 7살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초등학교 6학년~중학교 1학년 정도의 ‘아이들’ 이다. 정말 이 애들이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주변 환경에 순응하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틀을 깨고 살아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눈에 비친 유메미야 중학교 학생들의 겉모습은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 단지 살아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마츠우라와 카즈시도 그런 학생들 중 하나였다. 물론 나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살인은 정당방위를 제외하고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츠우라는 분신자살하는 밤의 왕자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보아주길 원했고, 카즈시 역시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며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살아있기만 한 모습 말고도 다른 면을 봐달라는 발악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 누구라도 이 애들을 그 자체로 봐주었다면, 아이들에게 지워진 그 기대를 조금이라도 덜어주었다면,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기를 먼저 살았던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순수한 그 자체로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소년범죄가 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맞벌이 부모의 증가와 조금만 머뭇거려도 도태되는 요즘 같은 사회에서 소년범죄는 의외의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심하면 심해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도 충격적인 소년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어른들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태어나는거지, 단지 살아있기 위해 태어나는 건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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