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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하는 썰/Dreaming

달력

by FC 2012.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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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의 종을 타종하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속 달력을 한 장 넘긴다. 새해가 바뀔 때면 새해다짐을 새로 하는 만큼 달력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서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엄마가 매년 1 1일에 꼭 하는 일이 있다. 양력 위주로 표기된 새해 달력에 음력 기념일을 꼼꼼히 써두는 일이다. 엄마는 날짜는 매년 바뀌어도 이렇게 적어놓으면 기억하기에 편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며칠 전 아주 효율적인 달력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윤달을 끼울 필요 없이 매년 날짜가 같은 달력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12달을 오로지 30일과 31일인 달로만 나누고 남는 시간은 5~6년에 한번씩 일주일을 추가해서 조정해, 해마다 같은 날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이 달력을 만든 사람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뀌는 날짜를 기억하기 어려웠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고, 매년 달라지는 날짜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비효율성이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계산한 대로 정확하게 살아야만 효율적인 삶인 것일까? 딱딱 맞춰진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 비해 시간을 덜 낭비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효율적이라고 단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살아가는 데 의미 없는 시간은 없다. 설령 버스를 잘못 타서 길을 잃어서 다시 되돌아 간다거나, 달력의 바뀐 날짜를 실수로 착각한다거나 하는 것들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에디슨은 수천번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 한 번의 성공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 모든 비효율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효율성에 대한 논의들은 경제학을 낳고 자본주의 사회를 발전시켰지만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는 못했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속도에 맞추어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태된다. 아니 세상으로부터 도태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단지 느리게 출발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도태되었다며 세상의 바깥 테두리로 밀어낸다. 지금도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앞서나가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남들보다 두 배 빠르게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붉은 여왕처럼 효율적인 사회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릴 것을 요구한다.


효율적인 달력은 죽을 만큼 뛰어야 하는 우리의 삶에 부스터를 달아준다. 더 빨리 남들보다 앞서가야 하는 우리에게 1초의 시간낭비도 하지 말고 달리라고 한다. 꿈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는 손석희 교수의 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아마도 이러한 경쟁사회에서 꿈을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의 바람이 아닐까?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는 입시, 대학에 와서는 취업, 취직을 해서는 승진을 위해 평생을 달려오기만 한 우리에게 천천히 가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었나 돌이켜본다.  아무도 천천히 가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 사회는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달력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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