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극단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꽤 답답한 관계가 있다. 나만 답답한 게 아니라 너도 답답하다. 서로가 귀를 닫았는지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다. 피자를 먹고 이건 맛있네, 맛없네를 다투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분명 우리는 똑바로 서서 적당한 예의를 갖춘 미소를 띄우며 대화를 한다. 나만의 이야기를, 귀는 닫아버린 채로. 그렇게 게워낸 빈 자리에 담는 것은 결국 또다시 나의 이야기다. 꽤 자주, 아니 1%의 예외의 가능성을 저 편으로 날려버린다면 항상 우리는 서로의 등을 보고 있다. 그렇게 만난지 1년. 우리는 서로에게 가진 호감을 방패 삼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기다린다.
그래서 훌륭한 과학자인 그는 멋진 걸 만들어낸다. 어쩌면 21세기의 발명품 순위에 꼽힐지도 모른다. 그의 손으로 빚어진 이 로봇은 아주 똑똑하고 예쁜 귀를 가졌다. 그가 말을 하면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이 끝나면 정확히 10초 뒤에 알았다는 OK램프를 깜빡인다. 그는 짐짓 행복하다고 느낀다. 로봇에게는 등이 없기 때문이다. 저 신화 속 메두사처럼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로봇은 OK램프를 깜빡이며 주인을 응시한다. 내가 만들었지만 넌 정말 황홀한 기계로구나. 그는 로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달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행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무겁게 짓누르는 적막한 공기에 이제는 등이라도 보고 싶다고 OK램프를 반짝이는 로봇에게 말했다. 로봇은 그의 소망을 들어주려 반 바퀴 돌았지만, 그는 또다시 정면만을 볼 뿐이었다. 이상하다, 너도 그러니? 로봇은 OK램프를 깜빡인다. 이제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로봇을 걷어찬다. 이 등신 같은 자식, 네 생각을 말하란 말이야! 찬 바닥에 누운 로봇은 10초 뒤 OK램프를 반짝였다. 그날 밤, 그는 한 달동안 함께한 로봇의 전지를 처음으로 충전하지 않았다.
그는 로봇처럼 무조건 들어주는 것은 지루한 복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그녀에게 문자를 했고 결국 만났다. 그런데 한 달 전과는, 그러니까 소금물에 설탕을 약간 넣은 만큼 달라진 것도 같다. 너무 오랜만이라 할 말이 봇물처럼 쏟아질 줄 알았는데 미묘하게 흐르는 어색한 기류가 그들의 등을 170도쯤 돌려놓았다. 그는 주먹을 쥐고 있는 손가락을 조심스레, 천천히 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심호흡을 했다. 저… 저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쭈뼛쭈뼛 서있던 그가 다시 손가락을 구부린다. 하나, 둘, 셋. 먼저 말씀하세요. 그녀는 잠시 토끼눈을 떴다가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어디 갈까요? 그가 구부린 손가락을 편다. 그의 시간은 한 달 동안 그가 겪은 외로움이나 지루함 같은 것들만큼 한 템포 느려진 것 같다. 그가 조심스레 말한다. 고기 먹읍시다. 아침부터 무슨 고기예요? 난 채식주의자인데. 그녀는 OK램프를 반짝이지 않았다. 그는 로봇을 떠올리며 이정도쯤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하나, 둘, 셋. 그러니까 우리 얘기를 해봅시다. 그가 구부러진 손가락을 본다. 그래도 이번에는 평행선만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