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무협영화에서 드러나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성향은 얼핏 보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나타나는 ‘미국 만세’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인다. 실제 내면은 어떨지 몰라도 겉보기에는 그 차이는 미미하다. 자국을 찬양하고 위대한 국가로 과시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흔한 일이다. 누가 뭐래도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며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친 중국인에게는 익숙한 일일 것이다. 문명사회의 시작이었던 세계 4대 고대 문명국가 중 현재 세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건 중국뿐인 덕분에 그들의 자부심의 근간은 가히 납득할 만 하다. 그래서 중국인 특유의 자부심과 우월감은 그들의 무협영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무협 영화는 미국의 자국 찬양적이고 지구의 보호자와 같은 역할을 강조하는 영화와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 이는 흔한 액션 영화와는 달리 중국에만 존재하는 무협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고, 중국의 현재 상황과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미국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국의 무협 영화는 미국의 ‘미국 만세’ 류의 영화에 비해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 둘을 비교하기에 앞서서 중국인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상당 부분 드러내고 있는 영화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두 가지의 특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하게 분류하면 저항적 민족주의, 중화사상 및 국가주의의 2가지이다.
중화사상과 국가주의는 종종 함께 다뤄진다. 이런 성향이 엿보이는 영화들은 최근에 제작되는 무협 영화의 유형으로 찬란하고 웅장한 시기를 주 배경으로 삼는다. 이들은 주로 장예모 감독의 영화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최초로 전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웅’ 이나 그 어느 시기보다도 화려한 문화를 자랑했던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황후화’ 가 좋은 예다. 이러한 유형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엄청난 스케일로 관객을 압도하는 장면을 여러 차례 보여주고, 그 웅장함을 바탕으로 은연 중에 강조하고 있는 국가주의가 마치 주된 내용이 아닌 양 감추는 기교를 부린다. 그러나 실제로 유난히 부각되는 거대한 세트와 수많은 엑스트라들은 과거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중국의 자존심이자 자신감의 발현이다. ‘우리의 문명은 이 정도로 위대하고 화려하다. 대단하지 않은가.’ 라는 그들만의 우월 의식을 강렬한 색감과 웅장함으로 보여주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 자신감을 전 세계적으로 과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위용을 자랑하는 스케일 큰 장면들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군림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이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감독의 화려한 색채감각 아래에 깔려있는 국가주의적인 시각과 은연의 중화사상을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여과도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웅장한 궁전 안에서 황금색 곤룡포와 황금관을 쓴 황제가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고 신하들은 하염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만세 만세 만만세’ 를 외친다. 이 ‘만세 만세 만만세’ 라는 말은 오로지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명의 ‘황제’ 의 무병장수를 위해 사용하는 말로, 그 외의 국가들이나 제후들에게는 ‘천세 천세 천천세’ 라는 말만 사용하도록 강요할 정도로 중국인들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색채의 사용도 마찬가지다. 금색은 예로부터 중앙과 수도를 의미하며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성기를 황금기라고 부르며, 중국은 그들 이외의 국가의 왕이 금색 곤룡포를 입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영화는 감독의 화려한 색채 감각인양 이러한 특징들을 보여줌으로써, 만천하에 중국인의 중화사상을 뽐내듯 드러낸다.
플롯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중화사상과 국가주의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보여준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 과 ‘황후화’ 의 그 화려함과 스케일, 액션 등은 플롯을 보충해주는 소도구에 불과하다. 이 영화들은 홀연히 군림하는 한 명의 황제와 그에 반기를 드는 인물, 하지만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 황제에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특히 ‘영웅’ 의 경우, ‘천하를 위해 당신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라는 이연걸의 마지막 모습으로 그들의 국가주의적 특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데, 이는 중국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독재라도, 어떠한 1인의 군림이라도, 어떠한 나라를 침공하고 약탈하더라도 인정하겠다는 – 타국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 야욕을 ‘대의’ 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포장하겠다는 말과 같다. ‘다수를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쯤은 감수할 수 있다.’ 는 다수결의 논리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종류의 허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비슷한 일례로 무협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김용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위국위민 협지대자(爲國爲民 俠之大者)’ 라는 말을 살펴보면, 적어도 무협에서 중국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위국을 위민보다 앞에 얘기함으로써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는 게 아니라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비록 일개 유명 무협 작가의 표현에 불과하지만 무협에 있어서 커다란 줄기를 이루고 있는 중국의 국가주의적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형은 정무문이나 황비홍, 무인 곽원갑 같은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무협 영화들이다. 이 유형의 영화는 거대한 세트나 색채의 화려함보다는 플롯 그 자체와 인물의 무술에 집중한다. 이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중국 문명의 위대함도 아니고, 자신만만한 우월감도 아니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가 국사와 한글을 장려하면서 우리의 ‘얼’ 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던 것처럼, 이 영화들은 개화의 시기가 늦어서 지금은 이렇게 외세의 압력에 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정신은 너희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관점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플롯의 흐름은 항상 중국의 상징적인 어떤 인물 – 대부분 주인공과 매우 가까운 관계의 인물이 등장한다. 가족이나 친척, 사부 등등 – 이 외국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암습을 당하거나 위기에 빠지면, 주인공이 그를 대신하여 복수에 나서고, 승승장구하다가 최종 보스에게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가 결국에는 승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항상 상대는 외국인이다. 개화기 당시에 중국에 압박을 주던 대상은 일본 아니면 서양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 유형의 영화들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울분과 그 울분을 해소하는 과정을 통쾌하게 그려내는 데 초점을 둔다. 각 영화마다 표현 방식은 다를지라도 근본의 내용은 저항적 민족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화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모든 서양 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일본, 러시아, 미국 등으로 묘사되는 제국주의자들의 일방적인 강요나 불합리함에 강하게 반발하지만, 상대적으로 영국에 대해서는 친화적인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이 영화들이 제작된 홍콩이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령이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덕분에 홍콩 사람들은 비록 혈통은 중국인이지만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발전된 서구 문물이 필요하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관점이 영화에 투영된 것이다. 12억 중국인들이 서구세력과 일본에 눌린 이유는 그 과학기술과 군사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저항적 민족주의 형’의 영화에서 이연걸이나 이소룡의 무술이 더욱 돋보일 수 있는 건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무술이 중국 고유의 것이라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만약 변발을 하고 중국 전통 복장을 한 이연걸이 일본의 가라데나 프랑스의 펜싱으로 그들을 꺾었다면, 관객들은 이연걸이나 이소룡의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승리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비록 웃음을 선사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승리에 따른 중국 관객들의 통쾌한 심정은 상당 부분 퇴색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 혼을 담아 민족의 전통 무술로 민족을 위협하는 이들과 맞서 싸워 ‘단신’ 의 몸으로 이긴 이연걸과 이소룡은 중국인들에게 굉장한 쾌감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10대1로 싸워서 이긴 사람들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나라를 이끄는 절대자가 아닌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인 이소룡과 이연걸의 통쾌한 승리는 중국인들의 생채기 난 자존심을 곧추 펴주는 동시에 그들의 민족주의적인 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가 아니었을까?
두 번째로 중화사상 및 국가주의 유형과 저항적 민족주의 유형은 제작 유인의 측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우선 저항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영화의 배경은 찬란하게 빛나는 중국이 아닌, 근대화의 물결에 휩싸여 혼란스러워하는 중국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고대 황금기를 배경으로 하는 유형은 지금도 영화의 소재가 되고 있지만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는 저항적 민족주의 유형의 영화는 점차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할리우드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카우보이 영화의 비중이 급속하게 줄어든 이유와 비슷하다. 카우보이 영화와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는 중국 무협 영화의 공통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시대의 격동기’에 있다는 점이다. 특히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둘 다 ‘근대에서 현대’ 로 넘어오는 시점에 위치한다. 즉, 이 두 시기는 가장 현대와 가까운 시기면서도 근대화를 아직 끝내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오늘날 거대 극장에 걸리고 수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영화들을 보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손에 꼽아야 할 정도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완전하게 옛 것에 대한 향수를 일으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총과 같은 현대 무기 – 비록 구식일지라도 - 가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완전하게 현실감을 느낄 수도 없어서 다소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탓이다. 너무나 어중간한 시기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점은 웬만큼 극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자극에 민감한 현대인들의 욕망을 채우기 어려우며, 제작 기술의 발달로 인한 다양한 장르 영화 제작의 빈도의 증가로 더 이상 영화는 극적인 플롯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즉, 플롯이 아니어도 영화 자체를 어필할 수 있는 방식은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덜 선호되는 형태의 영화일수록 수익성의 악화로 직결되고, 수익성의 악화는 영화 제작의 초점을 수익성이 있는 쪽으로 옮겨지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무협 영화가 미국의 ‘미국 만세’ 류의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는 영화의 제작의도가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지구상의 두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영화는 위에서 언급했던 이유로 더 이상 서부 개척시대나 근대화 시기를 그려내지 않고, 그들만의 국가주의를 담아내기 시작하는데 그 양상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지구를 보호하는 미국’을 어필하는데 주목한다. 반면 중국은 자신들이 ‘현대’ 지구의 왕자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보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시절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유구한 역사와 강대함을 표현한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던 인간 군상들과 시대상을 보여주던 중국의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시대 정서 상 그 어떤 무언가를 보여주기 어려웠기 때문에 단순한 유흥거리로 전락해버린 채, 주역의 자리를 황금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넘겨준다. 수십 편씩 제작된 황비홍이나, 주연 배우가 바뀌어가면서 각색된 정무문, 무인 곽원갑 등의 영화들은 익숙한 내용에 낯익은 주인공의 무술이 버무려진 흔한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비해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 드라마가 거의 제작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수많은 문화산업을 제쳐두고 영화에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담아내는 것일까? 이는 중국의 현재 국가적 위치와 관련이 있다. 현재 중국은 필요에 의한 자생적인 변혁의 시기에 놓여있다. 과거에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책봉을 행하던 시기의 ‘패자’는 아니기에,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과거를 향한 그들의 갈망과 자부심은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짙어진다. 그래서 개화기에는 어쩔 수 없이 외압에 의해 문호를 개방했다면 지금은 중국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변화를 추진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정황 상 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변화를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그 변화를 감당해낼 역량이 없어서 변화를 추구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 다소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식 정치체제로 인한 과거의 암흑기도, 근대화에 늦어서 수치스러운 시절을 보냈던 시기도, 결코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현대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영화는 최적의 수단이다. 고작 두어시간에 불과한데도 그 파급력만큼은 다른 어떤 수단에도 뒤지지 않고, 어떠한 강요도 들어있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 그 자체로서의 영화. 이를 통해 중국은 그들의 위대함과 눈부신 발전을 과시하며, 무려 6천만에 달하는 화교인구와 전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는 중국인에게 단결의 메시지를 보낸다. 마치 미국이 지구의 왕자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외압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중국은 줄기차게 본토에 통합되는 것을 거부하는 대만과 티벳을 보며 분열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주의를 내세워 단결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은 영화라는 문화적이고 덜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단일국가로의 단결을 주장함으로써 독립을 원하는 소수민족에 압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그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일본과 지구의 왕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그들의 경계심도 늦추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비단 무협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공연 행사 등과 같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이루어지는 동시다발적인 중국의 목소리다. 노래나 영화에 국가주의적인 메시지를 심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최근 발표된 홍콩의 대표적인 스타 사정봉의 ‘황종인’ 의 가사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 중국 문화의 국가주의적, 중화사상적인 경향은 더 이상 한 두 사람의 생각이 아니다. 민중을 움직이고 그들의 우월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이자 현재인 것이다.
천하의 모든 특별한 빛을 가진 우리 중국인
선홍색의 피를 갖고 있는 깊은 산속의 사라마인
네가 말한 그것은 나의 분노요 내가 말한 그것은 나의 분노이다.
몸을 사리지 않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중국인들 뿐이리
이전에 치료할 수 없었던 상처는 오직 최고의 역량으로 모든 대륙의 중국인들이 해결하여
동방을 등에 업고 맹렬히 휘몰아 치리라. 격렬하고 더 용감하게 우리의 중국에 속하게 하라.
일신에 거리낌없이 중국인의 세상에서 내가 어찌 영웅이 될지 생각하라
“황종인” – 사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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