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경우 수도꼭지는 틀면 물이 나온다. 요즘 TV를 틀면 오디션 프로그램이쏟아진다. 피겨, 음악, 패션 등 소재와 서바이벌 구성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범람에 따라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향한 비판 중 가장 목소리가 큰 것은 너무 많아서 질리는데도 계속 제작된다는 것이다. 키스앤 크라이, 위대한 탄생의 정통 오디션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나는 가수다, 키스앤크라이 같은 변형된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세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요일을 달리하며 채널을 지키고 있으니 가히 지겹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하다.
문제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예능의 대세는 토크쇼와 리얼 버라이어티로 양분될 정도로 두 장르의 비중이 높다. 그런데도 수도꼭지라는 식의 비판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이런 류의 비판이 나오는 것은 재미가 없어서다.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인데도 케이팝스타가 흥하고 위대한 탄생 시즌2가 생방송임에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은 프로그램이 주는 재미의 차이다.
추격자의 성공 이후로 영화도 한 때 스릴러물이 쏟아졌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영화가 시도할 수 있는 장르의 하나로 자리잡고, 다른 장르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프로그램의 한 장르다. 오디션 방식 자체가 지루함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디션 많으니 없애라 주장하기 전에 프로그램 자체의 재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시청률에 민감한 방송의 경우 수요가 떨어지면 공급에 변화가 생긴다. 방송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시도할 것이고, 이 변화에 의해 방송은 다시 다양성을 회복할 것이다.
멜로영화다. 솔직히 재미없다. 혹자들은 최고의 사랑과 라디오스타를 짬뽕해놓은 것 같다고 말한다. 둘다 보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떤 느낌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짬뽕같다는 말에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권칠인감독의 색깔이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이지, 딱히 의도적으로 그런 내용을 넣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비슷하다고 꼽으려면 최고의 사랑보다는 오히려 과속스캔들과 라디오스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pd 이정진과 한물 간 아이돌 가수의 이야기. 한물 간 아이돌 가수가 라디오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실 식상한 소재다. pd가 이민정에게 빠져드는 것도 좀 뜬금없었다. 적어도 계기가 있어야했다고 본다. 하다못해 첫사랑과 닮았다거나, pd가 변하는 이유만이라도 납득이 가게 묘사를 했어야했다.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갑자기 변하기에 이정진의 캐릭터는 너무나도 평면적인 캐릭터였다. 이민정이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노래를 다시 해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 영화는 의도하고자 했던 감동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민정은 간절하지 않았고, 이것이 이 영화의 패인이다.
이민정은 적어도 내 취향을 고려했을 때 괜찮은 배우다. 딱히 팬도 아닌데 시라노 연애조작단, 그대 웃어요, 꽃보다 남자, 마이더스, 원더풀 라디오까지 5개면 한 배우의 작품을 꽤 여러개 본 셈이다. 인터뷰나 tv에서의 이민정은 굉장히 여유롭고 쿨해보이는데, 그건 작품을 고를 때도 반영되는 모양이다. 조급하게 한방에 확 뜰 작품을 선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자기만의 기준이 나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굳이 노출같은 거 많이 하지 않아도 극에 잘 녹아나는 캐릭터. 그리고 요즘 한물 갔다는 평가를 받는 멜로장르에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캐릭터를 고르는 것 같다. 과한 거 없고 적당히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여배우가 쩌리취급 당하지 않는 걸로 잘 고른다. 단역에 가까웠던 꽃보다 남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존재감은 있는 캐릭터였다. 그래서인지 캐릭터 자체로 한방에 대박나는 건 딱히 없는데 중박은 꽤 여러번 친다. 영화든 드라마든 남자배우 위주로 돌아가는 최근의 경향을 돌이켜볼 때 이민정은 자신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축해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싱글즈, 뜨거운 것이 좋아, 원더풀 라디오는 비슷한 라인이다. 여자가 주인공이고 제법 쿨한척 하지만 따뜻하고 싶은 영화다. 다만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싱글즈에 비해 뜨거운 것이 좋아나 원더풀라디오는 플롯의 짜임새가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가 되겠다. 플롯이 엉성하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이며 그건 곧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권칠인감독은 퇴보하고 있다. 적어도 싱글즈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 감동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무리수가 있거나 억지로 짜낸 감동은 아니지 않은가. 어찌됐든 싱글즈라는 괜찮은 영화를 찍어냈던 감독인 만큼, 그리고 싱글즈 하나로 10년째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이니만큼, 기대치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영화를 들고 왔으면 좋겠다. 왕의 남자를 찍은 이준익 감독도 십년을 가지 못했다. 다음 영화에서는 싱글즈에서 본 특유의 색감,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권칠인감독의 재기를 보고 싶다.
신삼국지는 황후화나 적벽대전, 영웅같은 중국영화급으로 스케일이 큰 드라마다. 25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울 드라마어워즈에서 대상을 탄 작품으로 2012년 3월 현재 kbs2에서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밤 12시 35분에 더빙판으로 방영하고 있다. 제작비가 거액 투입된 만큼 전쟁씬은 매우 화려하고 스케일이 크다. 과거 후한시대의 백만대군을 tv화면에 그대로 재현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동원된 엑스트라의 수나 그래픽에서 완성도를 보인다. 화공을 펼치는 장면이나 성벽을 타고 오르는 장면, 수만의 기마대가 서로 맞붙는 장면은 삼국지의 백미다.
95편, 말이 쉬워 95편이지 신삼국지는 우리나라 드라마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흡이 긴 사극이다. 손권은 무려 9살 아역부터 시작해서 동오의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삼국지 하면 떠오르는 유비, 관우, 장비와 조조같은 캐릭터만 해도 초반에는 새파랗게 젊은데 70편쯤 오니까 머리가 하얗게 센다.
굉장히 긴 드라마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것은 '삼국지'라는 콘텐츠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드라마는 보통 캐릭터와 플롯의 흡입력으로 흘러간다. 백날 톱스타 나오고 스케일 커봐야 플롯의 흡입력이 떨어지면 드라마는 망할 수밖에 없다. 아니 어떤 것이라도 그렇다. 주어진 시간만큼 몰입시킬 수 있을 만큼의 탄탄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 흡입력은 곧 스토리의 짜임새와 매끈한 연결고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배우 이름값으로 흥행하던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다. 이런 면에서 후한 말기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신삼국지는 매력적인 드라마다. 삼국지는 수백의 등장인물이 있지만 각각의 캐릭터가 대표성을 띠고 있다. 인의를 대표하는 유비, 충의를 대표하는 관우, 지혜와 충의를 대표하는 제갈량, 냉철하고 차가운 간웅 조조까지 삼국지의 캐릭터는 다양하지만 각각의 특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강자와 약자, 라이벌구도, 충의, 인의, 그리고 성장과정과 패망 같은 드라마틱한 요소는 수천년에 걸친 세월에도 삼국지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다.
기존의 삼국지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흡입력과 캐릭터에 신삼국지는 '치우치지 않은 시각'과 '긴장감'을 바탕으로 일부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노숙과 조비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삼국지연의 자체가 촉을 중심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신삼국지에서는 노숙과 조비의 비중이 커지는데, 인물 자체에 대한 포커스를 맞춰서 긴장감을 조성한다. 삼국지연의 속 노숙은 주유와 제갈량에게 가려져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문관의 느낌이었다면, 신삼국지의 노숙은 거국적인 시각을 갖추고 의리와 소신을 갖춘 왕좌지재의 인물로 그려진다. 노숙의 미래를 보는 시각과 충의, 의리는 연의에서의 제갈량에 못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또 하나의 주목할 인물은 조비인데, 신삼국지는 조조가 세자를 임명하는 과정과 그에 따른 에피소드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조비가 독사를 이용해 조조의 사랑을 받던 조충을 죽이는 것, 조식에게 반란의 음모를 덮어씌우는 것, 그리고 조조가 그런 조비를 의심하고 추궁하는 장면은 95편 통틀어 가장 긴장감이 흐르는 명장면이었다. 이외에 신삼국지는 조조와 손권같은 촉에 반하는 캐릭터들을 유비의 입장에서 그려내지 않고 제법 공정한 시각을 보여준다. 신삼국지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옳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그려내고 캐릭터에 충실한다. 판단은 시청자의 몫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신삼국지는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잔인한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 기억속에 미화되어있는 역사 속 인물들의 잘생김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서 초반에는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미남, 미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원작이 있다면 어느 정도 이미지는 비슷해야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미염공이라는 관우나 미남으로 그려지는 조자룡은 글쎄. 게임과 만화를 통해 나에게 이미 형성되어있던 이미지와는 조금 갭이 있었다. 또한 스케일이 큰 데도 제작비의 문제때문인지 동적인 장면보다는 정적인 장면이 많았고, 대사가 많은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같은 사소한 단점에도 이 드라마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꽃미남으로 채우기보다는 캐릭터의 특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배우를 선택했고, 긴 대사나 정적인 장면에서 생겨날 수 있는 지루함을 콘텐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과 각색을 통해 극복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사극 경향은 정통사극보다는 퓨전사극을 선호한다. 따라서 좀 더 고대로 가고 만화적인 느낌을 살리려는 경우가 많다. 정통사극은 정통사극만의 매력이 있다. 신삼국지 정도의 각색이라면 역사를 창조한다는 퓨전사극에 대한 비판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어느 새 역사의 뒤안길로 점차 존재를 감추어가는 정통사극을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